Oh Jhin Ryung
거미줄이 끊어지는 찰나, 영원의 절단면, 그리고 사진
─ 오진령의 순간적 이미지들에 바치는 흩어진 말들의 푸닥거리

최 정 우 (비평가, 작곡가)


내게는 하나의 믿음이 있다. 작품에 대한 하나의 말, 하나의 발설은, 그 작품을 마주했던 최초의 시선으로부터 태어나며 또한 그렇게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일견 고루할 정도로 판에 박힌 듯 보이는 이러한 시각적 믿음, 그러나 또한 동시에 매번 새로우며 언제나 극단적일 정도로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예술적 믿음은, 내게는 차라리 어떤 종교적인 것에 해당한다고 고백해야 할 텐데, 믿음이란 것이 무엇보다 일단 종교적인 외관을 띨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이러한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믿음을 동어반복처럼 일부러 ‘종교적’인 것이라고 마치 다짐을 두듯 찍고 지나가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그 믿음이 거의 언제나 저 시선의 의식(ritual)이라는 일종의 순간적 제의의 형식으로부터 도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역설적인 것이며 동시에 깨어지기 쉬운 무엇이다. 그 믿음은 매순간 지속적으로 확고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순간으로서/써 살고 그 순간과 함께 사라져버릴 운명에 놓여 있는, 그런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묻자면, 그럼에도 이러한 찰나의 믿음을 여전히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또한 반문하자면, 이렇듯 사라지는 순간들의 순간적인 포착 그 자체가 이미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이 과연 종교적일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이 믿음이란, 바로 그 믿음의 깨어지기 쉬운 역설적 성격 그 자체 덕분에, 오히려 비로소 하나의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내가 오진령의 사진들 앞에서, 보다 정확하게는, 그 사진들을 통해서, 그렇게 되던지게 되는 반문의 정체이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사진 이미지야말로 바로 그러한 순간적인 것들의 기이한 (지속 아닌) 지속, 계속 그 자리에 멈춰 있을 수만은 없는 것들의 기묘한 (정지 아닌) 정지, 그리고 영원할 수 없는 것들,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의 이상한 (찰나적) 영원성, 신비한 (소멸의) 불멸성을 증언하는 거의 유일한 형식임에야. 그러므로 저 찰나와 영원이 기이하게 교차하고 공존하는 운명이란, 그대로 사진 그 자체의 운명이 되고 있지 않나.
나는,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오진령의 사진들과 그 이미지들이 가지는 힘이 바로 이러한 본질적이고도 치명적인 모순, 바로 이러한 근본적이고도 운명적인 역설이 품고 있는 최고의 긴장으로부터 도래한다고 항상 믿어 왔던 터다. 하여 나는 그의 한 사진으로부터, 그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그리고 그 한 장의 사진에 대한 나의 최초의 시선으로부터, 그 만남이 지니고 있던 어떤 ‘종교적’ 충돌의 장면으로부터, 비로소 시작(始作)할 것이다, 그렇게 시작(詩作)할 것이다. 지속될 수 없는 것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어떤 역설의 의지, 그러나 동시에, 보기 좋게, 말 그대로 (시각적인 의미에서나, 심지어 비가시적인 의미에서도)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마는 어떤 몰락의 의지, 그러나 또한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러한 실패 속에서, 아니 오히려 바로 그러한 실패 속에서만, 그 자신의 의미와 의의, 조건과 존재를 발견하게 되고 또 발견할 수밖에 없는 그런 털털한 듯 비장한 의지, 말하자면 나는 오진령의 사진들이 지니고 있는 그런 의지(들)의 목격자임을 가장 먼저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그런 목격자로서 말한다, 발설한다, 이 한 장의 사진에 대해서.

[사진 1]

나는 지금, 내가 오진령의 사진에 매료되었던 최초의 ‘순간’이, “거미여인의 꿈” 연작에 속하는 바로 이 한 장의 ‘영원’ 때문이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 (그가 󰡔곡마단 사람들󰡕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나중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 사진은 나를 끌어당겼으며, 어떻게 심지어 내 안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 같은 틈을 만들어냈던가. 나는 어쩌면 이러한 상처(stigmata)로서의 나의 믿음을 이야기하기/이해하기 위해 이 질문에 보다 엄밀하게 매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질문은 내가 답할 수 없는 종류의 물음, 그런 불가능의 물음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한 명의 평균적 평론가라면, 나는 이러한 나의 경험을 논리적인 언어로 해명하고 해석하며 또한 설득시켜야 하리라. 그러나 나는 이러한 당위적이고 인위적인 해명과 해석과 설득에의 요구를 넘어, 어쩌면 하나의 우연한 우회로를 따라, 하나의 거미줄 같은 이야기로, 그렇게 거미줄을 닮은 어떤 미로 같은 수풀 속에서, 나의 믿음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그렇게 발설하려고 한다, 헤매듯 찾아내려고 한다, 하나의 언어를, 아니 어쩌면 여러 개의 흩어진 말들을. 예고하자면, 이 에둘러 가는 길, 그 길은 하나의 밧줄, 그것도 거미줄 같은 밧줄의 모양을 띠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오진령이 어떤 한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자리에서 밧줄에 대한 인상적인 일화를 이야기했던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곱씹었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의식적으로) 그 이야기의 구체적인 상황들은 사상한 채 (무의식적으로) 그 이야기가 가질 법한 보편적일 정도로 허구적인 분위기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를 홀로 상상하면서, 그렇게 침잠하듯 그 이야기를 매우 주의 깊게 들었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 머리 속에서 되새김질하듯 다시 구성된 이야기를 통해, 그렇게 에둘러 발설하자면,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한 장의 사진이 될 것이다. 밧줄 하나가 어떤 공간의 중심에 등장한다. 그곳을 무대라 해도 좋고 풍경이라 해도 좋다. 그리고 그 긴 밧줄의 한중간이 찰나적으로 딱 잘리는 그 순간, 오진령은 현재라는 시간을 ‘순간적으로 영원히’ 경험한다. 이것은 물론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그러나 그렇게 그 밧줄이 뚝 하고 끊기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그에게는 현재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는 결정적 찰나처럼 느껴졌으며, 그 느낌 이후, 시간에 대한 더 이상의 정의는 없다고까지 생각했다던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는 무난한 중간점을 매개로 무리 없이 이어지는 어떤 연속적이고 편안한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란, 현재라는 찰나란, 일종의 단절 혹은 절단인 것. 따라서 이러한 현재라는 찰나의 절단면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서로 섞이지 않고 둘로 (혹은 그 이상의 숫자로) 나뉜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현재라는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여 미래와 과거의 시간은 포획되지 않은 채, 달린다, 도망간다. 그러므로 현재란, 순간이란, 찰나란, 시간이란, 곧 어둠과도 같은 영원의 절단면이 되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 사진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하여 내가 오진령의 저 사진 속에서 문득 두렵게 예감했던 것, 소스라치듯 놀라면서 느꼈던 것, 소름이 돋듯 가냘픈 전율로 감지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어둠의 의식(意識/儀式), 찰나의 무의식, 지금 그리고 여기(jetzt und da)의 시간이 지닌 캄캄한 빛, 어떤 화창한 소멸에의 의지였다. 그것은 말하자면 돌이킬 수 없는 것, 비가역적(非可逆的)인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이자 의지이다. 트램펄린을 이용해 점프하는 순간을 찰나적으로 포착한 이 사진은, 오히려 바로 그 찰나의 시간 때문에 역설적으로 어떤 영원성의 현재를 획득하게 된다. 순간의 운동성이 찰나의 영원성으로 탈바꿈하는, 그런 또 다른 ‘순간’ 혹은 ‘찰나’를, 이 사진은 어떤 ‘영원한’ 현재로 보여준다고 말해도 좋다. 도약의 ‘순간’은, 마치 저 끊어진 밧줄처럼 그렇게, 그대로 그 어떤 줄 없이도 공중에 목을 매단 채 ‘영원한’ 것이 될 수 있는 어떤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정지의 ‘찰나’가 된다. 오진령의 사진들이 주는 어떤 낯설고 생경한 어둠, 그럼에도 왠지 매우 가깝게 느껴지는 이 익숙한 소멸의 예감은, 바로 이러한 찰나와 영원 사이에 놓여 있는 극대이자 극소의 간극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게 순간의 목을 매단 영원의 거미줄은, 이처럼 끊어지고 없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오직 그렇게만 존재한다,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렇게 끊어진 상태로만, 그러한 부재의 상태로만, 어쩌면 그러한 부재를 가능조건으로 삼을 때에만, 오히려 그렇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저 밧줄이 그러한 것처럼, 그 밧줄의 절단면이 그러한 것처럼, 그러니까 말하자면, 현재처럼, 일종의 계시처럼 내려온 저 현재에 대한 무언의 가시적 정의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현재가 품고 있었던 저 단절적인 순간처럼.
그러나 동시에 그 끊어진 밧줄은 마치 거미줄처럼 허공을 직조하고 무한을 시각화한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상보성의 원리가 그러하듯, 거미줄을 보려면 전체적인 공간에 대한 시선을 거둬야 하고, 반대로 공간 그 자체를 보려면 거미줄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야 한다.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관측될 수 없으며, 무언가를 관측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에 다른 것이 언제나 영향과 간섭을 미친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무언가를 관찰하고 관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영원 또는 무한은 내게 결코 포획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이러한 ‘역설’이란, 나와 작품이 만나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품게 되는 근본적인 역설일 텐데) 하나의 찰나 안에서 영원을 느낄 때, 그때에서야 비로소, 이 사진은 내게 오롯이 드러나며 또한 온전히 들어온다, 침투한다. 허공에 붙잡힌, 보이지 않는 밧줄, 아마도 나는 그것을 저 거미여인이 꿈꾸는 거미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 거미줄은 그 줄에 매달려 조종당하는 어떤 꼭두각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오히려 그 보이지 않는 줄을 관장하는, 혹은 그 줄을 그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채로 내버려두는, 어떤 (무)의지의 행동, 그런 (무)의지의 (비)주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저 거미여인의 꿈이란, 그것이 어떤 백주(白晝)의 몽상이나 환영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꿈’임과 동시에, 어떤 어두운 밤의 소망이나 의지라는 의미에서도 또한 하나의 ‘꿈’이 될 수 있는 것. 고로, 그 꿈이란, 환한 백일몽이자 밝은 길몽임과 동시에, 또한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끔찍하도록 어두운 하나의 악몽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내가 저 사진 속에서 마주한 것, 저 사진을 통해 충돌한 곳, 저 이미지와 최초의 시선으로 조우했던 것/곳, 그러니까 곧 내가 저 사진의 ‘순간’을 통해 맞닥뜨리게 된 어떤 ‘영원’은, 바로 그러한 현기증 나는 명암이 서로 교차하며 공존하고 있는 어떤 의지의 꿈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이렇게 고백해야만 한다.

[사진 2]

그런데 이 고백이란 아마도, 가슴 설레는 수줍은 고백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남모를 관음증을 종국에 들켜버리고 말았을 때 쏟아낼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강제에 가까운 자백 같은 것이라고, 또한 나는 말해야 한다. 그렇다, 말하자면 나의 이러한 고백은 일종의 자백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그보다 먼저 고백/자백해야 하는 것은, 사진이란, 이미지란, 오히려 무엇보다 하나의 강제이자 요구이며, 또한 거꾸로 그렇게 어떤 강제이자 요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 말을 건네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언어를 부과하고 요청하는 사진 이미지의 힘이, 바로 이러한 밝고 어두운 방(camera lucida et obscura) 안에 있다고, 그렇게 나는 또한 믿고 있다.
하여 나는 다시금 이 한 장의 사진을 바라본다, 응시한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저 덤불 사이에서, 나를 응시하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서 있는 저 풍경을 향해, 저 시선 없는 응시에 또 다른 응시로 응답하듯, 그렇게. 저 을씨년스러운 황색 수풀은, 어떤 꿍꿍이가 벌어졌다가 저무는 곳, 못된 것들이 태어나고 스러지며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곳, 병든 것들이 서로를 마주 보거나 서로 물어뜯기를 계속하는 곳, 침묵의 수다, 무언의 악담, 묵음의 기담, 그렇게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들의 이야기가 드러나고 펼쳐졌다가 접히기를 지속하는 곳이며, 저 인형들이 서 있는 자리가 또한 바로 그곳이 된다. 그러므로 저 형체 없는 형체(아니, 어쩌면 형제 없는 형제)들이 어떤 거짓과 환영의 가면을 쓰고 있는 ‘가짜’ 또는 ‘무생물’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안일하게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가면은 그대로 얼굴 그 자체이기 때문이며(가면 아래 꽁꽁 감춰둔 ‘진짜’ 얼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형은 그대로 몸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인형이 본보기로 삼아 모방하는 ‘진짜’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진령의 사진 속에서 가면들과 인형들이 갖는 (무)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대신하는 어떤 대체, 혹은 무언가를 비유하는 어떤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라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가면들과 인형들은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정체성(identity)이 아닌 가장 낯설고 갑작스러운 이질성(heterogeneity)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나는 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저 누런 덤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인물들의 응시와 마주하면서, 그 응시에 마치 응답을 보내듯 또 다른 응시를 하면서, 그렇게 인식하고 감지했던 것은, 바로 사물과 사태 그 자체의 이질성이었다고, 아니 차라리, 사물과 사태를 대체하거나 은유하는 어떤 매개로서의 유사-동일성(pseudo-homogeneity)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과 사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어떤 무매개적이고 근본적인 이질성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오진령의 사진은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이나 어떤 이에 대한 재현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다른 문제, 또는 어떻게 되어도 좋은 문제이다. 이미, 그리고 언제나, 문제는 사진 그 자신이 마치 계시하듯 현시하는 사진의 이질성 그 자체이다. 가면과 인형의 존재와 응시는, 사물과 사태 자체에 어떤 근본적/급진적(radical) 이질성이 숨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오히려 그 자체가 이질성이 될 수밖에 없는 어떤 전도된 동일성이라는 사실을, 곧 그것이 거꾸로 그러한 이질성을 자신의 존재조건이자 가능조건으로 삼았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어떤 낯선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저 풍경을 응시하는 나의 관음증은, 내가 은밀한 능동적 주체가 되어 무언가를 엿볼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되는 어떤 편안하고 짜릿한 관음증(voyeurism)이 아니라, 차라리 내가 비밀스러운 시선의 수동적 객체가 되어 무언가에 의해 거꾸로 엿봄을 당하게 되어버리는 어떤 위험하고 뒤틀린 노출증(exhibitionism)의 자리에 가닿는다. 사진 앞에서, 나는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게 되는 것.
그러기에, 다시금 반복하자면, 또 다른 우회로를 에둘러, 그렇게 다르게 반복하자면, 오진령의 사진은 그렇게 하여 하나의 강제이자 요구, 무엇보다 하나의 요청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진 앞에서 어떤 근본적인 부재가 존재의 진리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는 하나의 요청, 관음증적 응시란 단순히 엿보는 것이 아니라 그 관음증 자체가 폭로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완성된다는 어떤 역전된 시선의 요청, 사진이 그저 사진으로서/써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말할 수 없는 말, 고백할 수 없는 고백이 그 자체로 이미 사진이 된다는 어떤 비의적인 사실에 대한 요청, 그러므로 또한 가면이나 인형은 얼굴이나 몸을 대신하여 표상하거나 비유하여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태 그 자체의 근본적인 이질성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요청이다. 이렇게 해서 사진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강제에, 인식론적인 요구에, 그리고 또한 이미지의 가장 ‘종교적’인 중핵으로서의 예술적인 요청에, 그렇게 가닿는다. 부재의 조건과 존재의 요청, 환영의 부재와 이질성의 현존, 찰나의 영원과 무한의 순간은, 이렇게 사진들 안에서 교차하며 공존한다. 하여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교차, 무엇보다도 가장 불안한 공존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반문하자면, 이토록 위험할 정도로 찰나적인 교차가 아니라면, 그리고 이토록 불안할 정도로 영원한 공존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과연 교차나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인가. 존재의 가장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조건이 부재임을 드러내지 않고서, 저 기이한 찰나적 영속성을 무한한 순간 안에서 드러나게 한다는 역설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서, 그것은 과연 ‘종교적’인 사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최소한 ‘예술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것도 아니라, 그저 사진 그 자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오진령의 사진들이 바로 사진이라는 형식 그 자체로서/써 스스로 묻고 답하며 다시금 되묻는 물음들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라고, 나는 믿어 왔다, 그리고 증언한다.
현재의 시간은 그렇게, 바로 이러한 절단면과도 같은 물음들과 함께, 찰나와 영원, 가면과 얼굴, 인형과 몸을 잇는 불가능한 단절들과 함께, 그러니까 곧 저 사진들과 함께, 그렇게 끊어짐으로써 이어진다, 부재함으로써 존재한다. 다시 나는 그렇게 사진을 응시한다, 그렇게 응시함으로써 또한 응시를 당한다. 저 인물들의 응시 사이로, 혹은 그 너머로, 개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다. 사진 속에서 그 동물적이고도 인간적인 싸움은, 그 성스럽고도 세속적인 싸움은, 말하지 못하는 가면과 인형들의 응시 속, 그 무섭도록 고요한 풍경 속에서, 그만큼 정적으로 보인다. 격렬한 싸움의 고요한 풍경, 소란스러운 투쟁의 적요한 배경, 이 무언과 묵음의 기묘한 폭력적 공간 안에서, 전혀 다른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하여 나는 다시금 사진을 바라보는 것이다, 눈을 씻고, 아니 차라리, 귀를 닦고서, 그렇게 다시금 사진의 인물들과 풍경들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다.

[사진 3]

당연하게도, 사진에는 소리가 없다. 눈을 씻고 봐도 사진은 말할 수 없고, 귀를 닦고 기울여도 사진은 소리를 낼 수 없다. 말은, 소리는, 그렇게 사진의 이미지라는 마치 무덤과도 같이 굳건한 평면적 틀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러나 파묻혀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들리는 소리, 곧 그렇게 파묻힘으로써만 오히려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어떤 진리가 존재한다. 나는 이것을 파묻힌 파편들이 목 없이 내는 소리, 육체의 조각들이 혀 없이 발설하는 언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렇게 나는 이것들을, 파묻히고 조각난 육체의 풍경들이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풍경은 두 다리를 모두 드러내놓은 채, 그렇게 보이며 또한 보고 있다. 공중에 붕 떠 있는 저 인물의 비행 혹은 (마치) 자살(처럼 보이는 도약)이 그러했듯, 혹은 저 인형들의 시끄러운 침묵의 응시가 그러했듯, 또는 적요하게까지 느껴지는 저 개들의 싸움이 그러했듯, 이 두 다리는 돌무덤을 이루고 있는 저 돌들과 결코 조화될 수 없는 어떤 이질적인 간극을 품은 채, 그리고 또한 밧줄을 보란 듯이 절단하고 거미줄을 보이지 않게 뒤엉키게 하는 어떤 불가능한 긴장을 머금은 채, 그렇게 돌들 위로 보란 듯이 돌출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오진령의 사진들과 함께, 그 사진들 안에서, 그리고 그 사진들을 통해서,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 자연은 결코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자연친화적인 것도 아니다. 자연은 언제나 자연 그 자체에 저항하며, 오진령의 사진들은 또한 바로 그러한 저항의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또한 가장 근본적인 역설이 하나의 진리로서 존재하며, 바로 이러한 진리야말로 저렇게 파묻힘으로써만 드러나는 육체의 풍경들이 전해주는 소리이자 언어인 것. 자연은 무엇보다 자연 그 자신에 반대하는 것이다. 소리 나지 않는 소리, 말이 되지 않는 말들, 파편 없이 부서진 파편들, 이 모든 것들은 이러한 간극과 긴장, 저항과 반대가 남긴 잔여물들이다. 오진령의 사진들이 증언하고 기록하는 것은, 다시 한 번, 바로 이러한 잔여의 절단면들이며, 이러한 절단면들이 드러내는 찰나와 영원의 이질적 변증법, 원인과 결과, 과거와 미래 사이에 가로놓인 기이한 현재의 시제이다.
나는 이토록 영원한 현재 안에서, 이토록 무한한 찰나 안에서, 하나의 웃음, 그 웃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 웃음은 일견 소름 끼치는 것이나 또한 매우 익숙하게 울리는 어떤 가까운 소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 웃음소리는 아주 메마르게 들리지만,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여전히 하나의 웃음인 한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친숙한 소리이기도 하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오진령이 저 웃음들을 ‘다른 웃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저 서커스의 웃음들을, 곧 웃음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또한 그 배면에 동시에 어떤 서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던, 저 서커스의 풍경들을 다시 한 번 연상시키지 않는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다른 곳에서, 다른 웃음으로.) 그 웃음은 슬프다기보다는 아주 차갑게 느껴지는 어떤 소리를 내는 것, 냉정하다기보다는 초탈한 듯 비장한 어떤 의지의 언어를 읊조리는 것이다. 웃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웃음, 웃을 수 없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태어날 수 있는 웃음,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웃음, 웃음의 대상을 프레임 바깥의 비가시적인 영역에 두는 웃음, 거미줄과도 같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웃음, 오히려 보이지 않음으로써 보이고 들리지 않음으로써 들리는 웃음, 웃음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을 비가시적으로 품고 머금는 웃음, 그 웃음 역시 어둠 속에서 오직 오롯이 드러나 있는 얼굴과 손, 그 파편들의 존재, 그 형체들의 부재로서만 소리를 내는 어떤 것, 그러한 찰나와 영원, 그러한 존재의 부재를 증언하는 어떤 것이다.

[사진 4]

그러나 이 웃음이 어디를 향할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소리가 어딘가를 향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러나 반면,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 웃음소리에는 어떤 곡(哭)소리가 담겨 있음을, 그 들리지 않는 다른 웃음소리가 종국에 어떤 곡(曲)을 소리 내서 연주할 것임을, 그것은 서커스의 쓸쓸한 풍경들이 드러내는 또 다른 즐거운 곡마가 될 것임을, 거미여인이 자신의 거미줄로 짓고 꾸어내는 또 다른 꿈이 될 것임을, 인형들이 말없이 소곤거리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임을, 형상들이 자연의 형상에 저항하며 지어내는 또 다른 몸짓이 될 것임을, 그리고 손만 내놓은 가면의 얼굴들과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바라보는 인형의 몸들이 만들어낼 또 다른 웃음이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고, 느끼고 있으며, 또한 믿고 있다. 기억하는가, 나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렇게 예고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일종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 ‘종교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임을. 그러나 동시에, 나는 또한 고백하고 자백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찰나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재하는 영원에 대한 ‘믿음’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사진과 이미지와 예술의 이름을 통해 거꾸로 어떤 ‘종교적인’ 것의 이질적 정체를 탐색하는 물음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임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실패가 예정된 여정 속에서 오히려 가장 어둡게 빛나게 될 소멸과 재생 사이의 간극, 순간과 지속 사이의 긴장을 직조하는 어떤 거미줄 같은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임을. 내게는 그런 하나의 믿음이 있다고, 나는 말할 것이다.

─ 2014년 2월, Paris에서, 람혼(襤魂), 합장(合掌)하여 올림.






* 최 정 우 (崔晸宇) :
1977년생. 비평가, 작곡가, 기타리스트.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같은 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했다.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을 저술했고, 󰡔싸우는 인문학󰡕, 󰡔알튀세르 효과󰡕, 󰡔아바타 인문학󰡕,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등의 책을 공저했다. 3인조 음악집단 Renata Suicide를 이끌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동양학대학(INALCO)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