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Jhin Ryung
서커스에 대한 단상
너무 아득하고 희미해서 묻혀버린 기억들 중 하나가 서커스 구경이다. 언제였을까? 허름한 천막 안으로 들어가 접시돌리기와 마술, 곡예 등을 마냥 신기해하면서 보던 일이. 마술사들과 곡예사들의 반짝이는 의상, 다소 우스꽝스러운 무대복, 몸에 딱 달라붙으면서 노출이 아찔한 의상, 너무 진하고 화려한 분장은 멋있어 보이는 만큼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우리들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마냥 다가왔었는데 그래서 그 천막은 일상적인 삶의 공간과 다른 차원의 인생이, 문화가 서식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곤 그렇게 떠돌며 사는 유랑이 혹 동경의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목을 뒤로 젖히고 두려움과 무서움증에 떨면서 그들의 곡예와 마술을 경이롭게 바라보던 눈들은 지금 무엇을 동경할까?
그 이후로 서커스는 명절날 빠짐없이 등장하는 텔레비전 프로 속에서 가끔 환생했다. 잊을만하면, 풍문처럼 떠돌던 그 서커스가 아직도 몇 군데서 명맥을 유지한다는 뉴스와 함께 다가왔다. 텔레비젼에서 보여주는 세계적인 서커스 공연이나 혹 데이빗 카퍼필트 쑈 등으로 대체되면서 여전히 보여졌다고 해야할까? 혹은 얼마 전 평양 교예단 장면을 우연히 시청하면서 불현듯 어린 시절에 보았던 서커스에 대한 추억이 살아 올랐다고나 할까.
어린 시절 한, 두 번 서커스를 본 일이 있다. 결코 많이 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마니를 깐 바닥에 앉아서 시큼털털한 내음을 꼬박 맡아가며 꽤나 집중해서 보았던 것 같다. 내가 경험한 서커스 풍경은 그러니까 70년대 초반의 시간대에 저당 잡혀있다.
동네에 서커스단이 들어오고 전단지가 나돌면 아이들은 저마다 흥분이 되고 들떠서 그 주변에서 떠나지 못했다. 며칠을 졸라 천막 안으로 들어가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무대를 응시하면서 마냥 신기해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들은 늘상 무언가에 허기져있었다. 먹을 것과 놀거리, 볼거리에 하염없이 굶주렸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텔레비전과 만화책이 유일한 오락이었다. 반면 서커스는 단연 최고의 구경거리였지만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서커스를 보러 가기는 어려웠다. 궁핍한 살림에 입장료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천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아이들은 천막 주변을 마냥 배회하면서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이나 환호에 덩달아 즐거워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은 천막의 틈새나 구멍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 당시에는 흑백 텔레비전도 몇 집 없어서 혹 ‘여로’나 ‘웃으면 복이 와요’, 김일이 등장하는 ‘프로레슬링’ 등을 할 때면 우리 집 마당으로 기십 명이 아이들이 진을 치고 함께 보곤 했다. 그 때는 무엇이든지 턱없이 부족했고 아쉬웠다. 먹는 것, 입는 것, 볼 것이 다 그랬다. 만화방이 거의 유일한 볼거리를 해소시켜 주는 그런 매혹적인 공간이었다면 서커스는 너무 경이적이고 신기하고 낯설고 웅장한 환상이었다. 그것은 결코 쉽게 보거나 자주 접할 수 있는 볼거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동네 공터나 골목 한 켠에서 약장수 아저씨들의 차력 쇼와 함꼐 곁들인 원숭이의 재롱이 자주 접하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 대개 회충약이나 만병통치약 등을 팔곤 했는데 우선 철봉을 구부리고 각목을 격파하거나 입에서 불을 내뿜는 솜씨를 보여준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여러 사진과 자료 등을 가지고 회충의 무서움에 대해 한참 겁을 주곤 했다. 그 당시들은 말들은 아직도 무서움증을 동반한다. 바람이 차가운 동네 공터에서 근 한시간 이상을 코를 질질 흘려가면서 그 장면을 넋 놓고 보았던 것이다. 약 살 돈은 없지만 구경은 공짜였으니까 마음껏 보았다. 그때의 기억에는 쇠줄에 목이 매달린 원숭이가 마냥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우선 들었다.
어디서 누구와 보았는지 잘 떠오르지는 않는다. 시장 옆 공터에 가설된 천막 안에 들어가 줄타기와 접시돌리기 등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고아들을 데려다가 어린 시절부터 식초만 먹이고 혹독한 훈련을 통해 그렇게 몸이 흐물흐물하다는 등, 노예생활과 다름없는 비참한 삶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두 들어서 그 풍문은 이내 진실이 되고 두려움이 되고 소문처럼 떠돌았다. 그래서 나는 짜장면 먹을 때마다 단무지에 식초 뿌리는 것이 저으기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어른들로부터 들은 서커스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부정적이고 음습했고 공포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네들이 부럽고 놀랍고 신기한 자태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혹은 술 취한 아버지와 잔소리가 심한 어머니가 마냥 싫어질 때는 차라리 그 고아들이 부럽기도 하고 저런 유랑의 생활이 낭만적이지 않을까 하는 턱없는 생각을 키우곤 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서커스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나 전단지가 주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약장수무리와 원숭이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곤 그것이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우연히 오진령의 사진 속에서 그 서커스를 만났다. 그녀가 찍은 사진 속의 서커스 장면은 추억화 된 장면이지만 사실은 최근 서커스단을 쫓아다니면 찍은 사진들이다. 그러니까 그 장면은 현재성을 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백사진 속에 나타난 서커스단원과 무대, 그네들의 천막생활과 일상들은 아득한 추억의 빛 바랜 장면의 환생 같다. 서커스단원의 삶에는 시간이 멈춰선 것 같다. 물론 변화는 있을 것이다. 중국인 곡예단이 들어왔고 이전과는 다른 묘기가 선보이거나 삶의 양태도 변화가 있었겠지만 어쩐지 사진에 나타난 그
모습에는 항구적인 가난, 쓸쓸함, 남루함과 애련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느낌이다.
오진령은 동춘서커스와 함께 한 5년의 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기간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다. 동춘서커스에 대한 일련의 기사와 방송을 접한 일이 있다. 1925년 박동춘이 일본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30여명의 조선사람들을 모아 만든 것이 ‘동춘서커스’라고 한다. 1927년 전남 목포시 호남동에서 첫무대를 올린 이후 70년대까지만 해도 단원들이 2백50명이 넘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고 한다. 현재는 남한에서 그나마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서커스단으로 알려져 있다.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동춘서커스단의 이력을 방영한 기억이 난다. 오진령의 이 사진들은 그 동춘서커스단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인 셈이다. 동춘서커스단원들과 함께 한 시간의 기록이자 그네들의 삶의 기록들이다.
그 서커스 사진들을 보다가 문득 서커스를 다룬 그림들 몇 점을 떠올려보았다. 근대에 들어와 서커스가 유럽에서 발달하면서 이를 그린 그림들 역시 등장했는데 다름아닌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당대의 도시풍경과 도시문화에 주목한 이들이다. 특히 드가의 ‘페르난도 서커스의 라라양’(1879)이 그런데 이는 이빨로 밧줄을 물고 아찔한 높이까지 올라간 곡예사를 밑에서 쌍안경으로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다. 그런가하면 쇠라의 ‘서커스단’(1891)도 있다. 우리의 경우 80년대 초 동양화가 김선두가 서커스단의 곡예장면을 채색화로 그려서 선보인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런 추억, 자취가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새삼 오진령의 이 사진들을 보니 아련한 추억들이 묻어난다. 서커스가 유년에 차지했던 그 벅찬 감동이 완전히 스러져 버린 나이에 이 서커스 사진은 무엇일까?

사진의 미덕
이 서커스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새삼 사진의 미덕을 되새긴다. 사진은 시간을 멈춰 서게 한 후 선택된 정지 상태의 인상을 던져준다. 매우 단편적이고 산만하고 임의적인 장면이고 인상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공적 역사와 기록에서 빠져나가고 누수된 것들, 그렇게 되기 쉬운 것들을 애써 그러모아 비록 추상적이고 모호한 내용일지언정 너무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각각의 사실들을 낱낱이 주시하게 해준다. 서커스 무대의 안과 밖, 이면과 속살들이 감촉되는 사진들의 목록이다. 자그마한 서커스단의 앨범이고 그 역사다. 다소 아쉽다면 이전 시대의 서커스단을 기록한 사진들은 없었을까하는 점이다. 일제시대에서 해방 이후, 6,70년대를 걸쳐 오늘에 이른 궤적들이 사진에 담아있다면 이는 상당히 중요한 기록이 될 것이다. 앞으로 그런 사진들이 모여져서 오진령의 사진들과 함께 묶여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새삼 서커스는 언제 이 땅에 들어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아마도 근대의 미명이 불을 밝히던 그 시점은 아니었을까?

근대와 시각혁명, 볼거리 문화
근대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신기하고 요상한 볼거리들과 함께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파노라마가 유행했고 뒤이어 사진의 보급과 유통이 뒤를 이었으며 그리고는 영화가 들어찼다. 이제 구연적인 말하기의 재현성 대신에 양화. 사진.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시각적인 리얼리티와 현전성을 희구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 근대 시각혁명은 무엇보다도 내국박람회에서 가능했다. 메이지 23년(1890)에 토우쿄우, 우에노에서 개최된 제3회 내국산업박람회에 맞추어 일본 최초의 파노라마관이 세워진다.
“실로 파노라마는 이처럼 관람자로 하여금 실제상황 속으로 끌고 들어가 관람자 자신이 지금 화폭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망각시키는 데에 그 묘미가 있다는 점에서 미술의 정수이자 교육의 첩경이다. 혹여 관람료를 거두고 일반 관람객이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한다고 하여 여타의 흥행물과 동일시한다면 이는 심히 누를 끼치는 견해일 것이다. 외국에서 파노라마는 일종의 박물관 유취관과 동일하게 대우하고 그를 통해 자국의 미술을 발휘하며 또한 국민의 상무사상을 장려한다.”
파노라마가 구성하는 공간은 정확히 균질 공간,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파노라마는 다른 것을 차별없이 보는 균질적인 공간 파악을 감상자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시각 혁명을 담당했다고 한다. 뒤이어 일본에서 ‘침혈사진기’라 불리기도 한 카메라 옵스큐라가 유행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상자의 한 쪽 벽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외광을 입사시켜, 구멍이 뚫려있는 쪽의 반대쪽 벽에 바깥 광경이 물구나무서도록 상을 맺어지게 하여 그 상을 감상하는 일종의 광학적 오락장치다. 그러나 이러한 볼거리의 유행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시각혁명을 초래한 물질은 다름아닌 사진이다.
본래 리얼리즘과 ‘초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던 ’사진‘이라는 말이 초상 사진(관)의 보급과 함께 포토그라피를 의미하는 말로 수용되어 가는 흐름은 일본 ’사진‘문화의 성립에 있어서 대단히 흥미로운 문제이다. 이는 한국도 동일한 궤적을 보여준다. 사진의 유행과 침윤은 ’시각‘의 양태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린다. 본래는 장소도 시간도 달랐을 풍경과 풍속이 사진에서는 등가물로서 그러면서도 엄청난 박진감을 가진 것으로 제시된다. 각각의 광경이 전혀 이질적이고 서로 무관해도 한 권의 사진첩이나 신문 잡지 속에서는 균등한 것으로 배분되는 것이다. 본래는 서로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만 출현할 수 있을 각각의 사진들이 가지는 고유한 시선이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동시에 경험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각각은 고유성을 가지고 있고 또 본래의 한 장 한 장 개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들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경험은 그 사진들을 동렬에 있는 것들의 차이 속으로 빨아들이는 ’지평‘을 사진에 부여해 버리는 것이다.
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기수가 도쿄에서 카메라 앞에 선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영화, 그러니까 ‘움직이는 그림’은 기존의 앎의 체계를 완전히 무효화하는 인식론적 테러였다. 아울러 영화는 식민치하에서 허용될 수 없는 ‘군중의 집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감시. 감찰. 훈육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영화는 1890년대 전기와 전차가 근대의 물적 표상으로 돌출하던 무렵에 사진 환등회를 통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3년 외국계 기업이 홍보를 목적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하면서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03년 길택상회의 영미연초회사 선전필름에서 1908년 동대문의 전기회사가 있던 자리인 광무대에서 미국인 콜브란이 활동사진을 상영했을 때 사람들은 ‘사진이 나와서 노는 모양’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뒤 1910년대 말 신극좌, 혁신단, 문예단 등의 극단에서 일본의 신파연쇄극을 모방해 제작되기 시작한 영화는 실상 예술적인 장르로서보다는 활동사진 자체가 주는 마력에 의해 대중들의 미의식을 장악해갔다.최초의 근대적 연예단체인 협률사가 1902년 선을 보였으며 극장이 문명국가의 제도를 모방한 ‘신발명’이라는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비판이 있었는데 하나는 공연물이 음란폐풍의 비속물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관대작 또는 부유한 집안의 청년자제들이 극장에서 음란행위를 일삼고 낭비적 사치를 추구하는 부랑아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광무대, 연흥사, 장안사 등 1900년대에 등장한 극장들이 협률사와 마찬가지로 (남)사당패, 날탕패, 기생연희, 판소리, 잡가(국창/명창 등)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민속연희는 남녀상열지사나 성희, 민담을 소재로 한 것이 주류이기도 했지만 1900-1910년대에 걸친 사회담론에서 신파극과 영화를 음란비속으로 규정하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음란비속은 근대적 가치체계를 중심에 두고 전근대적 문화양식을 주변으로 밀어내려는 자기비하의 표현이었다. 1910년대 극장 관련 시문기사는 극장에서 벌이는 각양각색의 이성애적 관계(남녀교제, 희롱, 은근한 제스처 등)에 대한 고발에 가까운 보고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1910년대 들어 영화가 기존의 전통연희는 물론 신파연극을 제치고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가시화되자 영화에 대한 질적. 미학적 판단은 유보되고 “학생의 선생이 도리 만하고 사회의 모범이 될 만하야, 신선한 문명의 공기를 실지로 보게 하야 상쾌 활발한 감상이 나게 하는 활동사진”의 관람을 장려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된다. 신문사, 잡지사, 기독청년회 등 언론. 사회단체의 지방순회 활동사진 영사회의 활약은 1910년대 영화전파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는데, 이는 영화가 근대성의 다른 아이콘들인 기차, 철도, 전기, 전차를 도입한 미국계 기업(한미전기회사)의 주도하에 전파된 내력과 연관이 있다. 즉 영화는 처음부터 전차나 전기와 짝을 이뤄 근대성의 또 다른 아이콘으로 들어온 것이다.
1900-1910년대 조선인 전용의 활동 사진관/연극장인 연흥사, 장안사, 광무대, 단성사, 우미관에서는 북촌의 일본인 전용 영화관과 달리 일본영화가 아니라 서양영화를 상영했으며, 조선인 변사를 고용하였고 입장료도 저렴해서 일본인 전용관과 뚜렷한 지역분할. 민족분할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도 극장이 민족성 그리고 종족성을 기반으로 한 ‘별도의 공간’으로 기능했을 것이라는 추론의 여지를 제공한다. 조선인 극장이 단순히 연예오락기관에 그치지 않고 식민치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종족의 공간이자 집합의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식민치하 극장은 근대적 문화제도로서, 스펙터클로서 쾌락의 소비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환상과 허구, 이미지의 자극을 추구하는 동시에 민족적 정체성을 위무받고 확인하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 놓인 제3의 종족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2,30년대 대중문화의 그 당시 표현을 빌면 영화야말로 가장 ‘값이 싸고 화려하고 재미있는 오락’이었으며 ‘세기의 총아’, ‘현대의 패왕’이었다. 영화는 대중오락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구문화를 직접 받아들이는 기폭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런 영화가 처음 활동사진으로 등장했을 때는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 활동사진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업고 선전용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오락적 기능에서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20년 취성좌의 김도산 등이 호열자예방 선전영화, 1921년 윤백남이 저축장려영화<월하의 맹세>를 만들었다. 1922년 조선극장 주인이 <춘향전>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1936년 이후에는 매년 1천만 명 이상의 영화관람객이 양산되었는데, 이들 중 다수가 중산층, 부녀자 관객이었고 영화에 대한 지식과 매너가 모던 인사의 필수교양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영화는 대중들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벗어나 대중의 정서와 미의식을 장악하는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로 부상했다. 외국영화가 대거 수입되면서 영화는 도시적인 일상의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서양 영화의 상영은 서구화된 육체, 성에 대한 개방적 관심을 포함한 도시적 삶의 모든 양식을 변모시켰다. 1930년대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등장에 영화만큼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
이렇듯 영화는 서구문화를 충실히 전달해온 근대의 전도사로 일종의 문화변동을 촉진시켰다. 영화는 일종의 체제(시스템)으로 자리를 잡고, 근대란 이름하에 서구 자본주의를 문화적으로 완성시키는 미디어크라시mediacracy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갔다.
주지하다시피 대중문화의 존재는 사회의 지배방식을 뒤바꿔놓는다. 매체를 통한 문화적 지배가 가능하며 그것은 항상 대중들의 잠재되어 있는 ‘욕망의 설득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은 물질, 라디오, 축음기, 영사기 등인데 이는 신문물과 신과학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두 번째는 조직이다. 유희에 대한, 오락에 대한, 감각에 대한 대규모의 조직적인 이벤트들이 그것이다. 전람회, 박람회, 운동회, 영화관, 유람단 등등의 구경거리들은 집단적인 의식과 유행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현대초기에 물질의 도입과 함께 뒤따른 신문물에 대한 관심은 새로이 등장한 문화현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192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문화적 현상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활동사진이라는 새로운 물건은 영화라는 장르로 정착되고, 귀신의 소리가 나오는 라디오는 대중 매체로 자리잡으며, 선교사들에 의해 벌어지던 놀이는 스포츠로 정착되면서 이들의 매체 문화가 지니고 있는 현대문화의 속성이 그대로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사회와 여가문화, 그리고 서커스
유럽의 경우 산업혁명기를 거쳐 주5일 반 노동일의 확산에 의해 보다 정기적이고 명확한 패턴의 휴일이 보편화된다. 노동과 여가가 분리된 근대적인 인위적 생활리듬이 정착됨으로써 여가문화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여가가 노동 경험과 관계없이 그 스스로의 운동논리를 가지는 시대가 개막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가시간만을 겨냥하는 새로운 산업, 즉 대규모의 레저 산업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여가의 상업화 경향과 맞물리면서 말초적인 흥미위주의 오락물이 범람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 가게 된다. 또한 전문적인 유희집단이 대규모로 형성되고,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대중 스타로 부상함으로써 지속적인 담론거리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 형성되는 보편적 호기심의 시장은 빠른 속도로 대중여가 시장을 확장해 가면서 저연령층으로 파고든다. 이러한 현상은 매스 미디어가 발달하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보편화된다.
근대사회에서는 여가의 사사화(privatization) 및 개별화(individuation)현상이 보편화될 소지가 마련된다. 여가의 사사화란, 여가가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일로 됨으로써 타인과의 직접적인 정서적 교류가 결여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여가의 개별화는 개개인의 여가가 공적으로 타인의 그것과는 분리. 구분되어, 어떤 특정한 형태의 경계가 지워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문맥에서 노동자들의 여가시간을 겨냥한 각종 통속적인 공연예술이 등장한다. 극장이 활성화되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주된 관객으로 등장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른 형태의 통속적 공연예술 중 대표적인 것이 서커스, 순회 동물원, 순회 쇼 단체가 합동 흥행을 한 것이다.
19세기 초반부터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1830년대 무렵에는 1년 중 언제라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한 대규모의 상설서커스도 생겨난다. 1860년대와 70년대에 이르면 서커스가 거의 모든 도시에서 공연되게 된다. 서커스는 모든 사회계급에게 인기가 있었고, 공연은 노동자의 퇴근시간을 겨냥하여 보통 밤 7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듯 극장, 뮤직 홀, 서커스 등의 오락은 점차로 여가가 증가하고, 토요일 오후가 쉬는 시간이 됨에 따라 19세기 후반기에 매우 번창하게 된 새로운 레저활동이다. 이는 우선 공장제 기계공업제의 정착에 따라 노동과 여가가 엄격하게 구분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로 인해 여가는 노동 경험과 관계없이 그 스스로의 운동논리를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 또한 노동과 여가의 분리는 여가만을 겨냥하는 새로운 산업, 즉 대규모의 레저 산업을 탄생시켰다. 레저 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공연물은 상업성과 흥행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노동 경험이 여가에서 재생산도리 기회를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흥미 위주의 오락물이 범람할 수 있는 시대가 개막된다. 공연예술에서 무대와 관객의 분리, 프로와 아마추어의 분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전문적으로 놀아주는 직업집단이 대규모로 형성되고, 그들은 대중스타로 부상함으로써 민중들에게 새로운 담론거리를 제공하고, ‘보편적 호기심’의 시장을 형성한다. 이러한 시장은 레저 산업의 상업적 목적을 더욱 가속적으로 충족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 반면에 대다수의 민중은 수동적으로 보기만 하는 입장으로 전락함으로써 그들의 예술적 감수성이 계발될 기회가 제약된다. 청소년 연령층의 노동자들이 대중문화시장으로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 발달하는 여가산업도 개별화된 정체감이라는 자기 도취감을 복돋우고 강화하며, 대량 생산된 여가상품은 개개인에게 독특하고 흥미로운 개인적 생활양식의 액세서리로써 제시된다. 이러한 전반적 현상은 전통적인 공동체적 여가문화의 쇠퇴와 그 맥락이 맞물리면서 이념적으로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으로 뒷받침된다.
근대화와 더불어 여가문화에서 일어난 또 다른 특징적 변화중의 하나는 여가의 온순화 경향이다. 여가의 온순화란 인간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 인간에게 잠재된 원초적인 감정을 임의적. 충동적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통제되고 순화된 형태로 충족시키는 방식이 지배되는 경향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 핵심적인 내용은 폭력성과 야만성의 감소이다.
쾌락과 즐거움의 감정이 상업화됨으로써 인간을 황폐화시킨다고 할 것 같으면, 근대사회부터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여가의 사사화나 개별화 현상, 온순화 현상 등은 모두 공동체적 생활정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약화시키면서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현대병을 낳는다.
현대사회에서는 노동분화가 고도로 진전되는 가운데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경쟁주의, 업적주의를 추구함으로써, 노동 경험에 바탕한 생활공동체적 문화가 약화되었다. 합리성이 생활 전체에 요구되는 현대적 삶의 양식에서는 그러한 행위는 불가능에 가깝다. 축제의 시기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정서적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왕성하게 일어나는 기간이다. 이러한 요소가 약화된 현대문화는 세련된 매너를 요구하는 생활정서 속에서 야성을 잃고, 축제의 정서를 잃고, 메마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인을 양산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생활에서 인간적 유대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퍼스낼리티를 창출하는 사회화의 과정을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독과 외로움은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이 같은 정황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우리의 서커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서커스는 일제식민지시대에 들어와 파란만장한 한국근.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반복해서 반영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저간의 사정은 한수산의 소설 ‘부초’에 나온 내용을 일부 인용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서커스가 이 땅에 처음 말뚝을 박은 것은 1911년 5월 1일, 일본의 <고사꾸라> 곡예단이 부산에서 공연을 가지면서였다. 이때까지 흥행의 대종을 이루었던 사당패는 개화의 물결에 밀려 이미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달리 이렇다할 구경거리가 없던 시대라 만화경에서부터 요술이나 곡예 등 천박한 흥행업자가 판을 치게 된 것도 시대적 변모에 따른 흥행시장의 불모성에 그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즈음 구경거리의 불모지에 뛰어들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통감정치와 더불어 대규모의 흥행집단을 끌고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선을 보인 서커스는 그 새로운 형태면에서도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렇게 발을 들여놓은 서커스는 십 여개의 단체가 한반도와 만주까지 오르내리며 그 펄럭이는 천막을 올렸다. 점차 서커스가 이 땅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신술이나 마술 그리고 신파연극이 곁들여지게 되었다. 시장의 왜소함 때문에 규모가 차차 축소되면서 서구에서 볼 수 있는 대장관은 사라져갔고, 결국 단순한 장비를 이용한 줄타기, 공중그네, 애크러배트, 마술 등이 주종을 이뤘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그 규모는 축소되었고, 그 내용도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천을 거듭했다.
국내 영화산업이 대중오락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아직 미숙한 시절, 서커스는 전후의 폐허를 누비며 다시 한 번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소규모의 흥행은 새로운 곡예사의 양성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전쟁고아나 가출소년을 길러 연기를 가르치다 보니 곡예의 질은 점점 떨어져갔다. 영화산업의 성장은 서커스에 커다란 충격파를 던져주었다. 관객이 점차 줄어들고, 작은 마을에도 상설 영화관이 들어서자 곡예단은 급기야 곡예를 줄이고 전반부에 무희들을 내세운 노래와 춤을 곁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방편은 되었지만 서커스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못하는 노래와 춤은 극장무대를 알고 관객들에게 야유의 대상이 되었고, 본격적인 곡예를 원하는 관객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진령의 서커스 사진
다시 오진령의 서커스 사진을 본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그래서 기억이 가물한 한수산의 ‘부초’란 소설을 떠올렸다. 내게 부초란 소설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함께 70년대의 가장 어둡고 슬프고 가슴아픈 소설로 다가온다. 해서 다시 ‘부초’를 읽었다. 다 읽고 난 후 잊어버렸던 애잔한 마음들이 키를 다툰다. 그리고 다시 오진령의 사진을 꺼내본다. ‘부초’에는 일월곡예단이 나온다. 이를 동춘서커스단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긴 코로 하모니카를 불며 물구나무 서기로 관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동춘의 마스코트‘제니’가 81년 겨울 영하21도의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새벽에 죽었는데 그 시신을 박제 삼아 천막 옆에 매달려있는 모습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텅 빈 눈, 테이프로 대충 감은 코, 그 앞에서 손가락이 입에 가득 들어가 만큼 집어넣고 프링글스를 먹고 있는 여자아이는 이 코끼리의 죽음, 또 그 코끼리의 죽음이 상징하는 이 서커스단의 신산한 삶의 이력을 알지 못한다. 오진령의 사진은 일련의 시간적 배열에 기초한다. 우선 특정한 장소에 둥지를 틀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기둥을 올리고 무대를 만들며 이후 간판과 매표소 등을 차리는 일들이 순서적으로 찍혀있다. 이 사진첩은 우리로 하여금 함께 서커스의 시작과 끝, 안과 밖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시각적 여로를 부추킨다. 그 장면들을 보다 보면 ‘부초’에 나오는 인상깊은 말들이 몇 토막씩 진눈깨비 마냥 날린다.

“그래도..우리야 직접 몸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 그까짓 테레비 기껏해야 사진이죠. 그림자지 별겁니까. 진짜배기로 치자면 우리가 윗길이죠. 암요. 세상에 자꾸 진짜가 없어지니까....언젠가는 도리어 우리가 빛볼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천막 치고 무대 짓고 재주피며 사는 게 우리들만은 아니란 걸 이제 나는 안다. 저 하늘이 천막이고 이 바닥이 무대지. 저마다 목숨껏 재주 한번 피우고 떠나는게 그게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이었던 거야.”
“고속도로, 수출공단, 빌딩...그런 것만이 이 시대의 얼굴은 아닐세. 농촌이 차츰 근대화되면서 토속적인 의미의 땅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있어.”

한 달만에 새로운 장소와 날짜로 바뀌는 서커스의 간판을 그리는 작업, 우뚝우뚝 솟아 있는 기둥들, 늘어진 안전 그물, 가로지르는 쇠줄 등이 있는 풍경(둥지를 트는 풍경)이다. 이제 한 곳에서 서커스를 시작하려는 순서가 그렇게 새겨있다. 단원들이 스스로 천막을 세우는 장면인데 그런면에서 서커스 단원들은 훌륭한 토목공사인부들이고 기술자들이다. 얼마의 시간 후 비로소 도시의 어느 빈 공터에 천막이 세워졌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장면도 있다.
오진령은 서커스단원들의 삶의 이모저모를 시간이 흐름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무대가 아닌 무대 주변, 무대에서 배제되고 지워진 타자화 된 영역에 대한 임상보고서에 해당한다. 그것은 서커스를 구경하러 온 이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이자 공간이다.
오진령은 ‘부초’란 소설을 의식하고 찍었을까? 그녀는 “곡예사들이 별종이 아닌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촬영하려고 했다”고 한다. 직접 그들의 삶의 공간으로 뛰어들어가 함께 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그 궤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이고 싶어한다. 사진들은 단지 창백하고 즉물적인 자료에 머물러있지 않다. 아마도 일정한 거리를 갖고자 했겠지만 오진령은 서커스단원들의 생애를 담은 이 흑백사진에는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 물처럼 스며들어있다. 곡예사 서정윤, 추연정 부부, 김장준비를 함께 하는 서커스가족, (나무 등걸에 기대고 서있는) 곡예사 연희양, 단짝 친구인 공주양과 꽃님, 서커스의 점심시간, 분주한 점심시간 후의 식당풍경 같은 사진들은 내겐 슬픈 사진이다.
더 없는 적막과 고독, 남루한 일생의 고단함과 스산함이 끈적하게 묻어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저마다 열심히 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저으기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꾸만 그 아래에는 정체 모를 비애가 서식한다. ‘천막 안에서 장가들고 천막 안에서 애 낳고, 천막 안에서 죽어라’고 하지만 그렇기에는 현실은 그저 몰락해 가는 연희인의 비애만을 남길 뿐이다.
고무 코를 붙이고 두 볼에 빨간 점을 찍고 인생이 애환을 몸으로 그리는 서커스의 어릿광대,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목숨을 거는 이들, 살아 남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극한으로 다스리는 이들의 육체는 단지 볼거리나 신기한 구경거리에 머물 수는 없다.
이 사진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어떤 일이 벌어지는 분위기의 발산 속에 위치해 있다. 사건이 활력이 감지된다. 그들은 줄을 타거나 분장을 하거나 혹은 공들여 기구를 만지고 수시로 연습을 한다. 그리고 우리와 또 같이 밥을 먹고(빈한한 식탁이지만)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살며 소박한 행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저씨와 아주머니, 아이들의 눈앞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한다. 작가는 그들에게 우호감과 친밀감을 통한 교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진은 피사체에 대한 차분하고 진지한 접근을 보여준다. 소박한 프레밍이 긴장감을 누그려뜨리는 부분도 있지만 과정도, 격함도 없이 그저 서커스단의 일상과 삶을 자연스럽게 잡아나가고 있다. 따라서 이 사진을 보고 읽는 데는 특별한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오진령의 서커스 사진은 현재 서커스단이 처한 운명과 삶의 초상을 차분하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일종의 보고서 같다. 그렇게 그녀는 공들여 그들의 생활을 찍었고 우리는 이들을 어떠한 편견없이 보아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