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Jhin Ryung
오진령이『곡마단 사람들』을 전시와 책으로 엮어낸 지 10년이 흘렀다. 서커스를 촬영하기 시작한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고 그 결과물을 모아 스물세 살에 첫 번째 개인전을 치른 후 <거미여인의 꿈>과 <몸짓>, 그리고 신작인 <웃음>까지 사진이력으로 삶의 절반을 채웠다. 대개의 작가들에게 첫 번째 작업은 이후 성장과정에 아리아드네의 실이자 자양분이 되는데, 오진령에게 사진의 첫 만남인 ‘곡마단 사람들’이야말로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그 위력이 발휘됨을 알 수 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재능을 보였던 이 무서운 신인이 이번엔 명쾌하고 성숙한 ‘웃음’을 선보인다. 지난 십 칠년 동안 잘 훈련되고 정련된 테크닉과 깊은 사유가 명징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그녀의 사진 속엔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몸짓이 있었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이 몸짓은 비동질적인 실연(實演)의 세계이고, 꼭 한 번만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카메라가 담아내기엔 더 없는 소재(주제)이다. 삶의 다채로운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람의 공연(행위)들은 기계적인 반복운동 같지만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몸짓도 무엇으로 일반화 할 수 없는 고유함으로, 사진인화지의 표면위에서 반짝거리게 되나보다. 오진령이 주객의 자리를 와해시키며 존재의 부름에 계속해서 응답해온 이유가 한 순간 반짝이며 튀어 오르는 저 사랑스러운 몸짓들 때문이 아닐까.

이번엔 그 몸짓의 주인인 얼굴들이 웃고 있다? 한 겨울, 한 낮의 태양아래 차갑게 빛나는 얼굴들은 내가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쳐다보는 듯하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오직 얼굴과 손만을 내놓으며 수동적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관객이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젊거나 주름진 피부, 머리카락의 컬러와 얼굴의 조형적인 윤곽 혹은 표정뿐이다. 외모에 사로잡혀 계속 얼굴을 살펴보지만, 얼굴을 증명할 수 있는 형식과 서술의 무력함을 깨달으며 이내 탐색을 멈추게 된다. 이처럼 보는 이를 무장해제 시키고 비공격적으로 만드는 이 얼굴은 그저 드러나 있을 뿐 아무런 말없이, 하지만 아주 ‘시끄럽게’ 웃고 있다! 사진 속의 얼굴은 사진이 표상하고자 하는 바를 피하고, 오히려 관객이 그에게 부여하는 시선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얼굴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뛰어넘어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 그것을 얼굴이라고 불렀다. 레비나스라면, 흔히 주체인 사진가의 위치에서 대상을 찍어 왔던 기존의 포트레이트의 범주로 결코 귀속될 수 없는 것이 ‘얼굴’일 것이다.

그래서 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드러날 수 없는 것이 드러남과 동시에 나를 타자에게 노출하는 일이기에 약간의 고통과 난해함이 따른다. 즉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어떠한 비전도 지식도 없이 그저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진령의 다만 웃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사진의 함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제껏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몸통은 사회적, 미적, 정치적 코드들을 박탈당한 채 커튼 뒤로 물러나 있고, (화장을 하였어도)살갗이 헐벗은 채로 숨김없이 드러난 얼굴은 웃고 있는 것이 아닌 생생한 뉘앙스로 상황만을 전달한다. 다만 ‘본다’는 개념을 거부하며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인다는 역설을 오진령의 <웃음>사진이 시끄럽게 말하려는 것이다. ‘말없는 말’의 강력함을 오진령의 소리 없는 <웃음>사진에서 보게 된다.